백일사
경전공부

성철스님─해탈의 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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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일사 댓글 0건 조회 815회 작성일 14-06-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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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의 길(2)


일체의 고통을 벗어 나서(離一切苦)
영원한 구경락을 얻는다.(得究竟樂)

이것은 기신론(起信論)에 있는 말인데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본래 불교에서는 현실의 세계가 불타는 집이요,
 
괴로움의 바다(苦海)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그냥 고생만 하고 말 것인가?
 
아닙니다. 부처님 말씀따라 도를 닦아서

무상도를 성취할 것 같으면 일체 고통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절대적인 안락과 영원한 자유를 성취합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이며 동시에 부처님께서 출가하시어
 
생, 노, 병, 사(生老病死)의 일체고를 벗어나서

구경락, 열반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왕궁에서 천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죽으면 그만이고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일시적인 행복을 버리고 수도를 하시어

영원한 열반락을 얻었으니 이것이 불교의 해탈입니다.


우리나라 신라시대 때 혜공(惠空)스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신라 원효대사하면 최고 아닙니까?
 
그 당시 원효대사의 선생 되는 스님이 바로 혜공스님이십니다.

원효스님이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혜공스님께 물었습니다.

두 스님이 함께 생활하며 나누신 말씀이 삼국유사라든지
 
다른 여러 기록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 혜공스님은 어떤 분인가?
 
혜공스님은 선덕여왕 때 재상 천진공(天眞公) 집의
 
종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평생 누구에게 글자 하나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생이지지(生而知之) 였습니다.

불교를 모릅니까? 유교를 모릅니까?
 
무소불통(無所不通),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 때 화랑 구감공이 사냥을 나가다가 보니 혜공스님께서 들판에서
 
죽어 있는데 몸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혜공스님이 큰 도인인 줄 알았는데 아무 소리도 없이 저렇게
 
돌아가시다니 묻어주는 사람도 없고

화장해 주는 사람도 없이 이렇게 썩어가고 있는가.
 
내가 화장이라도 해 드려야지 하여 화장을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경주에 오니 어느 스님이 술에 취해서 노래를 부르고
 
오는데 유심히 보니 혜공스님이었습니다.

한 혜공스님은 산에 엎어져 죽어 있고 또 한 혜공스님은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혜공스님이 승조(僧肇 : 383~4l4 중국스님,
 
구마라습 문하에서 역경사업에 종사) 법사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 자기가 지은 것이라고 하며
 
전생에 자기가 승조법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혜공스님은 한번도 배운 적이 없었어도 모르는 것이 없어
 
원효스님이 물어 볼 정도였으며

신통력이 자재하여 신라시대 10대 성인으로 추앙 받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우리 불교 역사에 많이 있습니다.
 
그 좋은 실례가 달마대사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대사의 일화 가운데 총령도중 수휴척리(手携隻履)라는 것이 있습니다.

총령 고개로 신발 하나만을 메고 서천으로 가 버렸다는 말입니다.

달마스님이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하고 돌아가시자
 
웅이산(熊耳山)에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몇 해 후 송운(宋雲) 이라는 사신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총령이라는 고개마루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스님 한 분이 신짝 하나를 메고 고개를 올라 오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바로 달마스님 이었읍니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너희 나라와는 인연이 다하여 본 국토 간다.

그런데 네가 인도로 떠날 때의 임금은 죽었어.
 
가보면 새 임금이 계실테니 안부나 전하게

과연 돌아와 보나 먼저 임금은 죽고 새 임금이 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도중에서 달마스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니, 달마스님 돌아가신지 벌써 3 년이 지났는데
 
총령에서 달마스님을 만나다니?

아닙니다. 제 혼자만 본 것이 아니고 수십 명이 함께 그 분을 보았습니다.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달마스님 묘를 파 보자.
 


무덤을 파 보니 과연 빈 관이었습니다.
 
관은 비어있고 신이 한 짝 밖에 없었읍니다.

달마대사의 “수휴척리”라는 말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해탈이라고 하여 그저 그런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사후에도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영원한 생명 속에 든 무한한 능력을
 
개발할 것 같으면 귀종선 선사도 될 수 있고,
 
혜공스님도 될 수 있고, 달마대사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공부만 부지런히 하면 자유 자재한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그 근본 골자가 어디 있느냐 하면 도를 깨쳐 영겁불망(永劫不忘)을
 
성취하면 영원토록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소개한 스티븐슨씨가 조사한 2000명 이상의 전생 기억은
 
아이들이 장난하는 물거품과 흡사한 것이지만

영겁불망, 이것은 허공이 무너질지라도 조금도 변함없는
 
대 해탈경계입니다.
 


그러면 그 영겁불망이라는 관문은 어떻게 해야 돌파할 수 있는가?
 
자고로 영겁불망의 생사해탈을 성취하려면

가장 빠른 길이 참선(參禪) 입니다.
 
참선을 하는데 있어서는 화두(話頭) 가 근본입니다.

화두를 부지런히 하여 바로깨치면 영겁불망이 안될래야 안될 수없습니다.

영겁불망 죽은 후에나 알 수 있는 것이지
 
생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숙면일여(熟眼一如). 즉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妹)하지 않고 여여불변(如如不變)할 때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숙면일여라고 하여 깊은 잠이 들어서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혹 생각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옛날의 조사스님 치고 숙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읍니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벌(識心分別)로서 봉사영혼 아닙니까?
 
 

봉사영혼이 되어서 업(業)따라 몸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업대로 떨어져 버립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 자유가 조금도 없고 업따라 가는 것을
 
“수업수생(隨業受生)”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경계가 되면 내 마음대로 입니다.

김씨가 되든, 박씨가 되든, 여자가 되든, 남자가 되든,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隨意往生)”입니다.

 

 



수의왕생 이것이 불교의 이상입니다.

그래서 「보살은 원력에 의해 태어나고 중생은 업력에 의해 태어난다.」
 
고 말했습니다.

수의왕생이 될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 자재한
 
그런 경계를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제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 가는 법문을 하고 큰 소리를 쳐도

몸 한번 바꿔지면 다시 캄캄해져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말입니다만

누구든지 아무리 크게 깨치고 아무리 큰 도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 깨친 경계가 동정에 일여(動靜一如) 하느냐?

몽중에 일여(夢中一如)하느냐?
 
숙면에 일여(熟眼一如)하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실제 깨친 경계가 이러 하여야 비로소 바로 깨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정일여도 안되고, 몽중일여도 안되는 그런 깨우침은
 
깨친 것도 아니고 실제 생사에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참선은 실제로 참선을 해 보아야 하고
 
깨침은 실제로 깨우쳐 봐야 합니다.

생사에 자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깨침이어야지
 
생각으로만 깨쳤다고 하는 것은 생사에 아무 이익도 없고

생사에 자유롭지도 뭇하며 그것은 깨침이 아니고
 
불교의 명(病) 이요, 외도(外道) 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공부가 실제로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
 
영겁불망이 되도록 죽자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신명을 아끼지 말고 정진하여 불사의 해탈경계를 성취하고
 
해탈도인이 되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을 제도해야 될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입니다.(끝)
 

 
**성철큰스님법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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